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폰 합스부르크 (문단 편집) === 황족에서 시민으로 === 종전 후 1950년 [[서독]] [[바이에른]] 남부의 푀킹(Pöcking)에 정착한 뒤로는 사회활동에 전념했다. 독실한 [[가톨릭]] 신자이면서도 [[이슬람]], [[유대교]] 등과의 화해를 주장하며,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필요한 부분에서는 진보적인 면을 가지고 있어 유럽 정계에서 "과연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손답다"며 존경받았다. [[합스부르크 가문]]은 역사적으로 [[종교]]와 관련해서는 보수적이지만, 이외 나머지는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굉장히 진보적인 왕가였다. 종교 문제에서도 [[레콩키스타]]로 탄생한 [[스페인]]을 통치하던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인 압스부르고 가문의 인물이 아닐 경우, 상당히 관대했었다. 이는 종교전쟁과 [[아우크스부르크 화의]]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.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가장 보수적이었던 [[페르디난트 2세]]는 자신이 [[가톨릭]] 신자였을 뿐 아니라 여동생의 남편이자 자신의 6촌이던 스페인의 [[펠리페 3세]]에게 지원을 받아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.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만큼 [[유럽]]의 다른 왕실에서도 그만한 예우를 해 주었다고 한다. 1961년 [[프랑코 정권|스페인]]의 카우디요 [[프란시스코 프랑코]]가 스페인의 왕위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. 당시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에 포함되어 있긴 했다. [[카를로스 4세]]의 여계후손으로 아버지 [[카를 1세]]가 카를로스 4세의 장녀 [[카를로타 호아키나]]의 차남 [[페드루 1세(브라질)|페드루 4세]]의 장녀 [[마리아 2세]]의 딸 마리아 아나의 외손자에 해당한다. 또한 증조할머니 [[마리아 안눈치아타|마리아 안눈치아타 대공비]], 외할아버지 [[로베르토 1세]], 외할머니 마리아 안토니아도 카를로스 4세의 여계후손이다. 마리아 안눈치아타는 카를로스 4세의 5녀 [[마리아 이사벨]]의 손녀, 로베르토 1세는 카를로스 4세의 4녀 [[마리아 루이사]]의 증손자, 마리아 안토니아는 [[페드루 1세(브라질)|페드루 4세]]의 동생 [[미겔 1세]]의 딸이다. 합스부르크가 스페인계와 오스트리아로 갈라지고, 스페인계의 부계가 절손되어 모계를 통해 부르봉으로 넘어간 지 200여 년이 넘어서 50위권 수준이라 사실상 의미가 없었고, 이에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상속 1순위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집안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거절하였던 것이다. [[7월 왕정]] 당시 [[루이필리프]]처럼 상속서열을 뛰어넘어서 군주가 되는 경우 다른 왕족들이나 귀족들에게 왕따당하기 좋은 구실이다. [[루이필리프]]도 별명이 '''폭동왕'''이었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왕위계승으로 간주되었다. 또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후 [[알폰소 13세]]의 도움으로 스페인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것에 대한 기억 때문에 과거 자신을 도와준 알폰소 13세의 후손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. 게다가 당시 스페인은 [[파시스트]] 색채를 드러낸 [[프랑코 정권|폭압적인 독재정권]]으로 다른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스페인 정부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. 따라서 스페인 왕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칫 나치에 항거했던 자신의 이력에 큰 오점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거절했다.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 동안의 인연으로 인해 프랑코와 개인적인 관계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으로 오토 폰 합스부르크 본인은 프랑코가 히틀러나 [[베니토 무솔리니|무솔리니]]와는 비견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옹호하기도 하였다. 1955년 오스트리아에서는 소련의 요구로 반 합스부르크 법이 부활하였고, 오토는 결국 1966년 반 합스부르크 법을 따라 제위 계승 주장을 포기하고 '공화국의 충성스러운 시민'을 자처했다. 1989년 [[동유럽 혁명]]으로 [[헝가리 인민 공화국]]이 무너진 후 [[헝가리]] 정치가들의 초청으로 헝가리 국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[[부다페스트]]를 방문했지만 왕정복고를 주장하지는 않았다. 헝가리 여론도 방문에 우호적인 정도였지 왕정복고를 바라는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. 정치적 성향은 [[중도우파]]였고 [[기독교사회연합]] 당원으로 [[유럽의회]]의 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했다. [[1988년]] 유럽의회에서 [[교황]] [[요한 바오로 2세]]가 연설을 하는 중 [[북아일랜드]] 출신의 골수 반가톨릭 친영파 출신 의원이었던 [[이언 페이즐리]] 의원이 중간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 "교황은 [[적그리스도]]다"라는 팻말을 들고 16세기 [[종교개혁]] 시기의 반 가톨릭 선언문을 외치는 일이 있었는데, 이 때 교황이 공개적으로 모욕당하는 걸 보고 화를 참지 못한 나머지 분기탱천하여 뒷자리에서 책상을 벌떡 뛰어넘어 팻말을 빼앗아 찢어버리고 "무례한 놈!!" 이라고 크게 호통치며 페이즐리의 얼굴에 펀치를 날리기도 했다. 이후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망 1년 전인 2004년 선왕인 카를 1세가 [[복자]]로 시복되었을 때 다시 교황을 알현했다. 당시 비디오. 뒷자리에서 날아와 손에 들고 있는 삐라를 빼앗아 찢어버리는 사람이 오토 폰 합스부르크 공이다.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JlbmIMbKZa4|관련 영상]]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분노어린 표정으로 팻말을 찢자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나왔고 의장이 페이즐리의 퇴거를 명하자 다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. 이후 페이즐리 의원은 회의의 보안 담당자에게 "내가 맞을 동안 뭐 했냐"고 항의하여 사과를 받긴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